사근산성(沙斤山城)은 함양군 수동면에 소재하고 있으며 1966년에 국가사적(史蹟) 제 1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동면 소재지 뒷산인 연화산(蓮花山) 정상부에 위치한 사근산성 전적지(戰蹟地)는 성(城)의 높이가 4m, 둘레가 약1370m의 산성이다.
이곳은 함양읍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동시에 서부경남에서 호남지방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다. 삼국시대에는 신라(新羅)와 백제(百濟)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치열한 공방전을 별였던 지역이고 지리적으로 교통과 군사상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사근산성(沙斤山城)이 축조된 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1380년, 즉 고려 우왕(禑王) 6년에 왜구(倭寇)의 침략을 당했다는 기록과 조선 성종(成宗)때에 허물어진 성을 다시 수축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말 삼남(三南)지방에는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했다. 중세기(中世紀) 일본사회는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치는 과정에서 몰락한 무사(武士)들이 해외로 눈길을 돌려 해적행위를 일삼아 왔었다.
그리하여 왜구는 1379년(고려 우왕5)5월에 약 3천여명의 병사가 조선에 상륙하여 진주를 침범한바 있고
이듬해 1380년인 고려 우왕6년 8월에는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병3000명이 삼남지방을 철저히 유린하고, 다시 경북 상주(尙州)를 짓밟고, 호남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이곳 사근산성(沙斤山城)에서 대혈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그때 고려에서는 삼도원수(三道元帥) 배극렴(裵克廉)을 비롯하여 박수경(朴數敬), 배언(裵彦), 도흥(都興), 정지(鄭地), 김용휘(金用揮),지용기(地用奇), 배언하(裵彦何), 을지(乙支) 등 9명의 장수가 이 싸움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장수 박수경(朴數敬),배언(裵彦)은 전사하고 500여명의 고려 병사들은 전멸하고 말았다.
성에서 흐르는 물이 피로 얼룩져 계곡은 혈계(血溪)를 이루었으므로
지금도 화산리 분덕(分德)앞의 죽산천(竹山川)을 <피내>혹은 혈계(血溪)라 부른다.
당시 함양의 감무(監務:군수)이던 장군철(張群哲)도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3000여명의 왜적이 이 전투에서 대승하고 함양읍(咸陽邑)을 유린한다음 운봉(雲峰)으로 진출하였으나
인월리(引月里) 와 운봉의 황산(荒山)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왜적무리들을 철저히 토벌되여 왜구의 난리를 평정하였다.
이를두고 후세에 황산대첩이라 명명되었고 이성계의 조선건국 초석이 되었다
사근산성 아래의 사근역
역(驛)이란 조선시대의 말을 이용한 교통 및 통신수단의 하나이다. 사근역(沙斤驛)은 산청(山淸)의 정곡역(正谷驛)과 거창(居昌)의 무촌역(茂村驛)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인 동시에 함양군(咸陽郡)의 제한역(蹄閑驛)과 안의현(安義縣)의 임수역(臨水驛)을 포함하여 14개역(驛)을 관할한 서부경남에서 가장 큰 역이었다.
구한말(舊韓末)까지 지금의 수동초등학교에 위치한 사근역(沙斤驛)에는 도찰방(道察訪:종6품벼슬)이 있어 60여명의 관원과 90명의 관노(官奴)를 거느리며 상등마(上等馬)10마리를 보유하는 역원(驛院)이었다.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인조(仁祖)때의 문신(文臣)이던 이도장(李道長)이다.
려말(麗末)의 사근산성전투가 얼마나 처절한 것이었는지에 대하여는 아래 2편의 시(詩)가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