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천 재경 백전면 향우회 감사, 실용풍수학회 회장 © 함양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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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 安東과 右 咸陽의 지세(地勢)
성리학(性理學)을 중시했던 조선시대의 인물평가 기준은 학문(學問)의 깊이와 관직(官職)이 정승(政丞) 판서(判書)의 반열에 올랐는지 여부를 우선시했다. 그 기준으로 조선 인물의 절반은 영남(嶺南)에서, 영남 인물의 반은 안동(安東)에서 배출되었다 하여 ‘좌 안동’ 이라 했으며, 한양에서 보아 우측에 있는 선비의 고장이자 일두(一竇) 정여창(鄭汝昌), 유호인(俞好仁), 노진(盧鎭) 등 뛰어난 학자들이 배출된 고장을 ‘우 함양’ 이라 했다.
예부터 인걸은 땅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난다고 하였는데, 산은 높고 청(淸)하며, 강물은 맑고 넓고 굽고 길어야 좋다고 했다. 태백산맥의 정기가 흐르고 낙동강이 굽이치는 안동 고을의 국세(局勢 : 풍수지리학에서 마을과 도시의 터, 지세를 일컫는 말)는 위천수가 흐르는 함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다.
안동의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등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들과 함양 출신 학자들의 명성에도 강물의 넓이만큼 차이가 있지만 ‘우 함양’ 엔 ‘좌안동’ 에서 맡을 수 없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로마시대에 왕과 귀족 등 사회 고위층들의 봉사, 기부, 헌납, 전쟁참여로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 고대 로마가 1천년동안 유럽을 지배한 힘의 원천이었음)의 향기가 짙게 흐른다.
특히 정유재란 중 도저히 승산 없는 황석산성 전투에서 오직 구국(救國)의 일념만으로 목숨과 전 재산을 바쳐 산화한 전 함양군수 조종도, 유명개, 곽준 님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했다.
◈함양 인물 절반은 백전에서 태어났다?
함양의 인물 절반이 백전면에서 태어났다면 과장일까?
백전면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정기가 남덕유산에서 깃대봉, 백운산, 월경산을 지나 운봉을 거쳐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그 정기를 오롯이 받는 지역으로서 영남에서 제일먼저 장군이 된 백남권 님으로 부터 국회의원 박정규, 재일 민단장을 역임한 청송 박병헌님 등 지면 관계상 설명이 불가할 정도로 많지만, 함양출신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현한 인물을 꼽는다면 재일 민단장을 역임한 청송(靑松) 박병헌(朴炳憲)님을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우리는 박병헌 하면 두 차례 재일민단 단장을 지냈고, 함양 백전 간 16Km 도로 옆에 벚꽃나무 1만 2,000그루를 심었다는 정도의 인물로 알고 있으나 그분의 생애를 조명해 보면 로마나 영국의 지도층에 못지않는 기부와 희생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헌신한 애국자였다.
청송은 암울한 일제 강점기 백전면 평정리에서 박봉수(朴奉秀)님의 9남매 중 6남(여덟째)으로 태어나 12세에 형들을 따라 도일한 후 낮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야학으로 공부하여 1949년 명치대(明治大) 전문부(專門部) 법과(法科)에 입학한 후 ‘한국학생동맹’ 의 창설 멤버로 학생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조국을 지키려고 ‘재일학도의용군’ 842명을 모집하여 자원입대 및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고, 양평 용문산 전투에서 총알받이나 다름없는 육군소위 계급장을 달고 혁혁한 공을 세운바 있다.
특히 청송은 굳이 입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재일동포 신분이었고, 당시 한국군은 김일성의 6.25 기습남침으로 서울이 3일 만에 함락되고 한 달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나 대한민국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절대 절명의 순간에, 살아서 돌아온다는 보장 없이, 군번도 없는 재일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여 인천 상륙작전, 양평의 용문산전투에서(중공군의 대 병력을 상대로) 목숨 걸고 조국을 지킨 젊은이였다.
참고적으로 6.25 전쟁 당시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야간폭격임무수행 중 전사했으며,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아들도 한국전쟁에 육군 소령으로 참전했고, 중국 지도자 마오쩌뚱의 아들도 중공군에 편입되어 참전한 후 미군의 폭격을 받고 전사했지만 시신 수습도 포기할 만큼 치열한 ‘동아시아의 국제전’ 이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