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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사람을 시켜 일생의 길흉을 점쳐 뇌천(雷天) 대장괘(大壯卦)를 얻었는데 그 단사(彖辭)에‘곧은 것이 이롭다.’라고 했다. 그래서‘크게 장대하면 그친다(大壯則止)’라는 뜻을 취하여 집에 편액(扁額)을 하고 자호(自號)로 삼았다. 사람됨은 별다르게 뛰어난 점은 없다. 다만 득실·영욕·생사에 대해 정해진 분수가 있음을 얼추 알아서 기쁨과 슬픔을 헛되이 쓰려 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의복과 완호물(玩好物)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고 오직 옛사람들의 문장을 좋아하여 깊은 경지를 대략 엿보았다. 다만 병을 자주 앓았기 때문에 힘쓰지 못하여 이룬 것이 없었다. 요행히 급제하게 되어 적은양의 봉급을 얻어 부모 봉양이나 하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청화의 요직에 잘못 오르고 재상의 반열에 갑자기 오르고 말았다. 지위는 높으나 덕은 박하고 은혜는 후중하나 보답함은 없었으므로 처음의 마음과 어그러지고 말았다. 지금 늙고 병들어 이제 죽을 날이 멀지 않다. 살아서 기록할 만한 좋은 점이 없는데 죽은 뒤에 다른 사람의 화려한 말을 빌려 사실을 왜곡한다면 그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이에 스스로 나의 평생을 기술하여 후인에게 남긴다.
위 내용은 조선후기 정조 때 좌의정을 지낸 즉지헌(則止軒) 유언호(兪彦鎬:1730~1796·66세)가 죽기 전 미리 써 둔 묘비명이다.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사경(士京), 호(號)는 즉지헌(則止軒), 시호(諡號)는 충문(忠文)이다. 31세 때인 1761년(영조 37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57세 때인 1787년 우의정, 65세 때인 1795년 좌의정까지 올랐으나 다음해 생을 마감했다. 정조의 탕평책(蕩平策)을 옹호하였다. 문학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인물로 평가된다. 저서로 『즉지헌집(則止軒集)』이 있다. 사후 6년이 지난 1802년(순조 2년)에 정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규장각(奎章閣) 한국학연구원에 그의 초상(肖像)이 있다. 다음은 그의 철학이다. 후세인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소개한다. 처음 급제(及第)해 경연에서 주상의 하문에 답변할 때 당에는 군자의 당과 소인의 당이 있음을 말하여 주상의 뜻을 크게 어겨, 주상께서 내 이름을 한권(翰圈:홍문관 명단에서 삭출)하라고 명하셨다가 곧 그만두셨다. 이렇듯 처음 군주를 뵈면서 언론 때문에 양화를 자초했으므로, 내 스스로 우활하고 어리석어 당대의 쓰임에 적합하지 않음을 알아 항상 한 치 앞으로 나아가면 한 치 뒤로 물러날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처음 춘방에 들어가 동궁의 자질이 신성하신 데다가 뜻을 공손히 하고 묻기를 부지런히 하심을 보고, 미천한 정성이나마 전부 바쳐 보답하고자 생각했다. 고사를 인용하여 동궁을 권면했다가, 북쪽 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유배지에 도착하기 전에 소환되었다. 이후로 더욱 진취하려는 뜻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호서의 고을에서 돌아와 안성의 선영 아래에 거처를 잡고 관직을 제수하면 번번이 사양했는데 간혹 그만 둘 수 없어서 왕명을 따르기도 했다.
임진년(1772년·영조48년)에 이르러 유언비어가 일어나자, 나는 청명당으로 지목되어 천청(天聽:제왕이 들음)을 두렵게 만들어, 마침내 체포되어 거의 불측지죄(不測之罪)에 빠지게 되어 흑산도에 유배를 갔다. 조금이라도 정론을 견지하는 조정의 선비들이라면 잇달아 조정에서 쫓겨나거나 유배당했다. 분수와 재주를 헤아려 보면 지나치게 영화로움이 두렵기에 물러날 것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권간(權奸:권세를 가진 간신)이 나라의 정권을 마음대로 하여 밖에서는 충역(忠逆:충신과 역적)의 대안(大案)을 잡고 안에서는 위복(威福:위력으로 억압하기도 하고, 복덕을 베풀어서 사람을 달래기도 하는 일)을 부려 한 시대의 인물들을 유인하고 협박하므로 일에 매우 처리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 보면 못난 재주와 기이한 행적으로 과분하게 양조(兩朝:영조와 정조)의 크나큰 은덕을 입어, 두 분께서 함정과 돌팔매로부터 구원해 주고 위해로부터 막아 주어 불식하고 보호하심이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터웠으나, 풍파와 위험을 겪은 것도 역시 매우 많았다. 융성한 은혜에 보답할 수 없고 험난한 길은 더욱 가기 어려우므로, 벼슬에 나아가 군주를 져버림이 벼슬에서 물러나 도에 부합함만 못하다. 항상 분수를 지켜 스스로 편안하여 만년의 절개를 보전해서 벼슬에 나가지 않아 은혜를 직접 갚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은혜를 갚으리라고 생각했다. 이에 집에 이름을 붙인 뜻을 져버리지 않지 않겠는가? 겸손과 지조의 표본이 아니었던가! <저작권자 ⓒ 함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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