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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 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9)
 
함양신문 기사입력  2023/05/22 [10:07]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희랍의 스파르타 사람에게 죽음을 당한 스파르타 에우리폰 왕조의 초대 왕 아기스 Ⅲ세(?~BC331:재위:BC338~BC331·7년):아기스는 스파르타 군과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와 싸운 그리스인 용병 8천 명, 그리고 동맹군을 더해 보병 2만 명, 기병 2천 기(騎) 병력을 모아 아기스 스스로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코라고스 휘하의 마케도니아 군을 펠로폰네소스에서 물리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메갈로폴리스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군의 병력 수에 밀려 패배하면서 부상을 당해 전사했다. 이 패배가 결정적이 되어 스파르타가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일으킨 반란은 스파르타의 패배라는 결과로 끝났다. 아기스는 자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동생 에우다미다스가 다음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죽으면서 다음과 유언을 남겼다. 「악인들의 무법한 수작으로 죄 없이 죽어 가는 나 일망정… 울지 말아라! 나의 죽음이 그들의 값이니까」. 지도자답고 장군 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유언이라고 생각된다.

 

▶인도에서 해독 가능한 가장 오래된 문자 기록을 남긴 아소카 왕(BC268?~BC232?):아소카의 기둥은 기원전 268년부터 232년까지 인도의 마우리아 제국을 다스렸던 아소카의 칙령이 새겨진, 혹은 아소카 대제의 치세 기간 동안에 돌로 제작되어 세워진 기둥으로 인도 대륙 전역에 걸쳐 흩어져 있다. 아소카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기둥을 가리킬 때 담마 텀바(Dhaṃma thaṃbhā), 즉 '법(담마)의 기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번역될 때는 아소카 석주(石柱)라고도 불리며, 신라의 승려 혜초(慧超)가 쓴 『왕오천축국전(徃五天竺國傳)』에는 당(幢)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소카의 기둥은 거의 모든 불교 사원, 석가모니 부처의 생애와 관련되어 있거나 그의 순례 장소 등 많은 중요한 유적지에 세워졌다. 아소카가 세웠던 석주 가운데 그의 칙령을 기록한 것까지 포함하여 20주 가량의 기둥이 현존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꼭대기의 동물 문양까지 온전하게 보존된 것은 7주밖에 되지 않으며 평균 높이는 12~15m이고, 무게는 50톤에서 60톤까지 나가며, 때때로 수백 마일의 거리를 운반되어 세워지기도 하였다. 아소카의 기둥은 인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석조 조각 유물 중 하나로써 인도 역사의 중요한 건축물이자, 마우리아 양식을 상징하는 기념물이기도 하다. 아소카의 기둥보다 더 오래된 것은 아소카의 기둥보다 조금 더 앞서 제작된 파탈리푸트라 기둥 장식밖에 없다. 기원전 3세기 이전 인도에서는 건축물의 주요 재료로 목재를 주로 사용하다가 점차 석재로 변화되어 갔다. 이 아소카의 기둥의 꼭대기 부분을 장식한 사자 모양의 장식을 그래픽으로 표현한 디자인이 1950년에 인도 공화국의 국장(國章)으로 채택되었다. 비문(碑文)에는 이런글이 새겨져 있다.「마가다의 왕 쁘리야닷씨(Priyadassi)는 승단의 수행승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에게 건강과 매사의 안녕을 기원하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존자들이여, 얼마나 짐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참모임에 존경과 신뢰를 펼쳐나가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존자들이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어떠한 가르침이던지 그것은 훌륭하게 설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존자들이여, 진정한 가르침이 어떻게든 오랜 기간 존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길에 관하여 나에게 떠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존자들이여, 짐은 수많은 비구와 비구니들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의 경들을 항상 배우고 사유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아소카왕은 불교의 후원자로 잘 알려져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아육왕(阿育王)’이라 불린다. 부처의 유골을 여럿으로 나눠 인도 전역에 스투파(유골을 매장한 인도의 화장묘)를 만든 것이 대표적인데 나중에 이를 탑파(塔婆), 더 줄여서‘탑’이라 불렸다. 그의 포교 노력은 해외에까지 영향을 미쳐 조선시대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부처의 일대기와 설법을 기술한 책『석보상절(釋譜詳節)』에는 「우리나라 금강산과 전남 천관산에 아육왕탑이 있다.」고 적혀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인도가 석가모니의 탄생지인데도 현재 인도 국민의 대다수(약80%)는 힌두교도이며, 이슬람교도가 10%를 넘고, 불교도는 전 인구의 1%도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 아소카왕은 본인이 불교도였음에도 타 종교를 관용하고 보편적 진리와 평화를 강조했다. 다인종·다종교·다언어 국가인 인도는 이런 아소카왕의 정신을 바탕으로 수립된 나라임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것이 인도의 저력이다.

 

전경익 

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함양중학교 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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