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기고 >
[전병일] 문민정부 탄생 30주년(1993.2.)을 맞이하여(6부)
 
함양신문 기사입력  2023/05/22 [10:03]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전병일 백전초등학교 백주년 기념사업회 회장, 경기도 민주동지회 사무처장    © 함양신문

 

김영삼 민주화를 위한 23일간의 단식투쟁 

광주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탄압과 폭력, 학살을 비롯하여 민주인사들의 연행, 고문, 언론탄압과 통폐합이 되자 목숨을 걸기로 결단을 하고, 5개 항을 요구하면서 1983년 5월 18일 김영삼은 단식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측근들이 찾아와 함께 투쟁하고, 함께 죽자고 호소를 하여 23일 만에 종료하였으며, 전 세계 언론에 톱기사화 되었다.

 

민주산악회 결성과 민주화추진협의회 창립 

김영삼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이 다방에서 만나는 것까지 탄압을 받게 되자 산으로 가게 되었고, 매주 목요일에 산행을 하기로 하였다. 김영삼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이심전심으로 모여들어 1981년 6월 9일 민주산악회가 결성되고, 김영삼, 김대중 세력과 재야인사들이 연합하여 1984년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창립하였다. 민주화 투쟁을 하는 단일체가 되었지만 실제 참여하는 인사들은 대부분 민주산악회 회원들이 주를 이루었다.

 

신한민주당과 통일민주당 창당 

전두환이 제4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 되고, 헌법을 개정하여 제5공화국 대통령이 되면서 민주화의 봄날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전두환의 2중대·3중대 역할을 하던 민한당이 새로운 신한민주당이란 선명야당을 1984년 12월 창당하고, 김영삼의 복심 이민우 민주산악회 회장이 총재로 취임을 하였다.

 

신민당은 1985년 2월 12일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제1야당이 되었으며, 민한당을 흡수·통합하였으며, 1986년 12월 여러 차례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민우 구상을 발표하였다. 그러자 김영삼, 김대중은 이민우 총재와 결별하고, 1987년 5월 1일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으며, 김영삼 총재, 김대중 상임고문으로 만장일치로 추대가 되었다. 

신한민주당은 이민우만 남아있는 빈집이 되었다. 

 

6.10만세 60주년을 기념하는 6.10만세 행진, 6.29항복 선언 

1926년 6월 10일 조선황제 순종이 승하하자 3.1운동 이래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우리민족의 주권회복 정신을 불러일으킨 사건으로 때를 같이하여 1987년 6월 10일 민주인사들이 전국에서 총궐기하였다.

 

빌딩에서 내려다 본 넥타이 부대들이 참여를 하고, 여성들과 어린 학생들도 참여를 했으며, 데모대를 향하여 최루탄을 날리던 경찰들도 어린 학생들이 군중 대열에서 발견이 되자 경찰들도 후퇴하게 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전두환 정권은 민주정의당 노태우 당 대표로 하여금 6월 29일 국민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는 항복 선언을 하여 민주화의 승리로 민주투쟁이 막을 내리면서 각 도시의 거리는 축제 분위기가 되고,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대통령 직선제개헌과 전국이 폭력으로 얼룩진 대선 

노태우의 6.29. 항복 선언으로 개헌에 급물살을 타게 되고, 각 정당 대표들이 모여 협의를 한 것이 대통령 5년 단임제와 모든 공직선거는 수요일에 한다는 골격을 정했다.

 

대통령선거에 즈음하여 양김 단일화요구가 새로운 기폭제가 되었으나 무산이 되고 말았다. 김대중이 광주에서 집회를 하여 50만 지지자들의 성원을 배신할 수 없다면서 측근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평화민주당 창당으로 분열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에 뒤질세라 김영삼은 부산 수영장에서 집회를 하였는데 200만이 모여 세계기네스북에 올랐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1987년 12월 16일 1노3김의 대통령선거는 지역감정과 지지자들의 폭력이 각 지역에서 발생을 하였다.

 

한 예로 12월의 영하의 날씨에 여러 대의 관광버스에 나눠 타고 김영삼의 전국 유세장을 수행하는데 광주의 유세날이라 긴장하여 새벽 4시 집을 나서 아침 일찍 광주에 도착하였다. 만약을 대비하여 시 변두리에 차를 세우고 상당히 먼 길을 도보로 이동을 하였고, 역전에 도착해서 식당을 들어갔다. 그런데 “당신들 한테는 밥 안 팔겠다.”며 나가라고 하여 딴 식당을 가니 같은 식으로 몰아내 한 마디 했더니 주인아주머니가 주방에 들어가 설거지통을 들고 나와 머리에 끼얹었다. 머리에 콩나물 대가리가 어지럽게 붙어있고 너무 추워 다방을 들어갔으나 역시 쫓겨났다. 오전 내내 춥고 배고픈 날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뉴스를 들으니 오늘의 마산 김대중 유세장에서는 폭력이 없기를 바랐지만 유사한 폭력 사태가 있었다는 보도에 수치스럽기도 했다. 

결과는 노태우 당선에 김영삼 2위, 김대중 3위, 김종필 4위로 노태우가 5년 단임제의 첫 대통령이 되었다.

 

구국의 결단으로 호랑이굴로 들어간 3당 합당 

1988년 4월 26일 실시한 13대 총선에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평화민주당보다 전국에서 4.5%라는 표를 더 받고도 3당으로 추락하는 수모가 되었고, 125-70-59-35라는 의석으로 여소야대가 되어 노태우 정권은 시작에서부터 험로가 예상되었다.

 

대선 패배 후 백의종군을 선언한 김영삼은 8선의 국회의원이 되면서 당원들의 성원으로 총재에 복귀하여 네 번째의 야당 총재가 된 것이다.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의 3당 연합정부 구성의 제안이 들어오자 김영삼은 연합정부에 반대를 하면서 3당 합당이라면 하겠다고 화답했다.

 

1990년 2월 15일 민주자유당으로 합당을 하고, 노태우 총재,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김종필·박태준 최고위원으로 당의 체제가 완료되었지만 권력이라는 밥상 앞에 한 지붕 세가족의 동상이몽은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김영삼의 정면 돌파와 승부 근성이 성공을 한 것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함양신문
 
 
[전병일] 문민정부 탄생 30주년(1993.2.)을 맞이하여(6부)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가장 많이 읽은 기사
[속보] '선거법 위반 혐의' 신성범 국회의원 '선거법 위반 혐의' 제3신 / 함양신문
주택가 교회증축 문제로 불교의 ‘자비심’, 기독교 ‘사랑’이 정면충돌하는 모습 / 함양신문
향우 강준석 부산항만공사 사장, ‘제12회 부산국제항만콘퍼런스’ 개최 / 함양신문
오도재 가는길 행복을 기원하는 사람들... / 함양신문
[정상목 기자가 만난 사람] “바로 이곳이 함양산삼축제장 핫 프레이스” / 함양신문
[시인/克重 안병민(향우)] 화담숲속 9월을 걸으며 / 함양신문
경남도, 국민의힘-경부울 지역민생 예산정책협의회 개최 / 함양신문
영어에 푹 빠져 즐겁게 놀아요! / 함양신문
함양군, 백연유원지에서 개최 국·내외 투자자 및 관계자 방문 / 함양신문
함양군보건소, 치매극복의 날 기념 캠페인 개최 / 함양신문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