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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일] 문민정부 탄생(1993.2.) 30년을 맞이하여 민주화의 신화(神化)를 남긴 3대 혁명가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문화재 김영삼 일대기(2부)
 
함양신문 기사입력  2023/03/27 [10:10]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함양향우 전병일 경기도 민주동지회 사무처장, 남양주시민회 남양주신문사 경민일보 회장  © 함양신문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정치 출발기록 아직도 유지되고 있어

 

청년 김영삼은 국회부의장과 국무총리인 장택상 수하에서 국가 미래와 민족을 위해 어떤 정치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경륜과 수련을 쌓아 1954년 출생지 경남 거제에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를 결심하고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를 설득하여 무소속 후보로 등록을 했다.

 

선거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유당 이기붕 실력자의 면담요청에서 자유당 입당을 권유받고 투표일 직전 민주주의는 정당 정치가 요체라는 원칙에 뜻을 두고, 자유당 소속으로 5월 20일 선거결과 20,770표로 14,110표의 변호사인 민주당 서순영 후보를 따돌리고 25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어 75년의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연소 기록을 아직도 보유하고 있다.

 

김영삼의 정치 철학인 ‘불의와는 굴복이나 타협하지 않겠다.’는 소신에 처음부터 높은 벽이 앞을 가로 막았으나 어려운 첫 관문을 잘 돌파했다. 25세의 최연소 국회의원 김영삼은 경무대의 면담 초청을 받고 국민들로부터 국부라는 우상의 존칭을 받는 대통령 앞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마주하면서 긴장하고 있었으나 대통령의 제안은 뜻밖의 3선 개헌이라는 말에 김영삼 의원은 단호히 반대를 했다.

 

대한민국 건국의 준엄한 역사의 가치와 이승만 대통령은 민족의 영원한 대통령으로 그리고 국부로서 추앙을 받기 위함의 충정의 진심어린 마음이라고 반대 이유를 역설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나가버리고 이기붕 실력자나 동행한 의원들로부터 “왜 그런 반대를 하였느냐?”는 충고를 받았지만 “대통령이나 우리 모두 잠시 살기 위하여 영원히 죽는 역사 앞에 부끄러운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반격의 충고를 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청년국회의원 김영삼의 충언을 수용했다면 망명도 미국 땅에서 서거하여 쓸쓸한 관으로 귀국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과 자유당 탈당, 민주세력 규합 

제4대 국회의원 낙선

 

초선의 젊은 김영삼은 국회에서 개헌이 추진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존경하지만 3선 개헌은 존경할 수 없다며 김두한 등 동료 의원들을 비밀리에 규합. 20여명의 동의를 받아 1954년 11월 27일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 연임 제한 철폐 개헌안을 무기명 비밀투표에서 부결시켜 대통령과 자유당의 영구 집권야욕을 무산시켰다. 그러나 하루 뒤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부결 선포한 개헌안을 사사오입이라는 희한한 수학논리로 개헌안은 통과된 것이라고 역선포를 하여 잠시 영광을 누리기 위하여 역사 앞에 죄인이 되는 인물이 되고 말았으며, 그로 인하여 김영삼은 동료의원 12명과 12월 9일 자유당 7개월 만에 탈당을 하고, 헌법수호를 위한 호헌동지회를 결성했다.

 

국내외로부터 미래 한국의 큰 인물로 지목이 된 김영삼 의원의 탈당으로 자유당의 양심 세력들이 연달아 당을 떠나 137명의 자유당소속 의원은 119석으로 줄었고, 김영삼의 호헌동지회 61석은 야권을 연합. 84석이 되어 신익희, 조병옥, 장면, 곽상훈, 박순천 등 원로 거물정치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민주당 창당발기준비위원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를 하여 중앙당 청년부장 겸 경남도당 부위원장이 되었다.

 

정당정치는 민주주의의 교과서라고 신봉한 김영삼은 새로운 정치의 가시밭길을 출발하게 된 것이다. 순탄한 정치의 길이 될 수 있는 여당 자유당을 탈당하고 야당이 된 김영삼은 대여투쟁으로 신익희 등 원로들의 다음 순으로 늘 등장을 하게 되었고, 권력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이 되었다. 강한 투쟁의 발언을 마치고 발언대에서 내려오면 신익희, 조병옥 등 당 수뇌부들이 악수로 격려를 했고, 기자들은 맹장이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

 

불법적 위헌의 개헌에 불복하고 야당의 길을 걷게 된 김영삼은 제4대 총선에서 경남 거제가 아닌 부산 서구로 선거구를 옮기게 되었는데 권력이 그를 당선되도록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자유당은 김영삼을 낙선시키기 위하여 경남지사를 지낸 이상룡 내무부장관을 내세워 김영삼의 선거 방해와 투표함 바꿔치기, 환표 등 온갖 부정을 폈으며, 33개의 투표함 중 16개를 개표한 결과 70%의 압도적 득표로 당선이 확정적이었으나 나머지 17개 투표함에서는 7표, 2표 등 자유당 후보의 무더기 표가 나와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는데 김영삼의 10번의 국회의원 출마에 9번 당선이 되고 유일한 낙선의 기록이다.

 

3.15부정선거와 4.19혁명, 7.29선거와 제2공화국, 5.16쿠데타

 

1958년 제4대 총선을 전국적으로 온갖 부정과 탈법으로 얼룩지게 하였으며, 그 여세를 몰아 1960년 3.15정·부통령선거에서 부정선거에 자신을 가진 자유당은 폭력과 협박, 관권선거가 노골적으로 자행되었다.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신익희, 장면의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로 전국을 강타하고 민심의 동요로 당선이 유력하자 신익희 후보의 전국유세 중 열차 안 급서로 온 국민은 허탈에 빠지고 슬프게 하였으며, 장면 후보가 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4년 후 1960년 선거 역시 야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 박사가 의문의 중환으로 미국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서거하여 상대후보가 없음에도 이기붕 부통령 후보를 당선시켜 노령의 이승만 대통령의 만약을 대비. 승계자로 하기 위한 혈안이 도를 넘고 말았다.

 

3.15일 선거일 전 이미 40%의 사전투표 준비로 당락은 별의미가 없이 이승만, 이기붕이 정·부통령에 당선이 되자 때마침 의인들의 도시인 마산에서 “내 표를 돌려 달라.”고 부정선거 규탄데모 시작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마산에서 실종된 김주열 고등학생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전국의 대학생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이승만 대통령 물러가라.”는 하야데모가 이어지고 수많은 학생들의 참담한 희생의 결과를 남기고 4.19라는 역사적인 대혁명이 완성되었다. 그로 인하여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으로 제1공화국의 막을 내리면서 부정부패 원흉들은 사형과 무기 등 중형의 결과를 가져 왔다. 현역 국회의원이 아닌 김영삼은 원외였으나 4년 동안의 원내 활동 등으로 당 중진들로부터 절대적인 존재감의 신임을 받아 당에서 주도적 역할에 서기도 하였다.

 

학생궐기혁명에 의한 이승만의 하야로 7월 29일 제5대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부산 서구에서 출마하여 자유당 정권에서 법무부장관을 지낸 서상권 후보보다 5배 이상 득표를 하여 29,754표로 당선이 되었다.

 

민주당 구파소속인 김영삼은 제2공화국 장면의 신파정권과 결별을 하고 윤보선, 김도연, 유진산 등과 1961년 2월 신민당을 창당. 유진신 원내총무에 부총무가 되어 왕성한 정치 활동을 펼치는 시기에 5월 16일 새벽 육군소장 박정희 가 한강을 넘어와 쿠데타를 발발하여 정치인들의 정치를 중단시키면서 제2공화국은 9개월 만에 막을 내리고 군정이 시작되었다.(다음호에 총 4부 중 3부 3·4공화국 관련내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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