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충현 재외함양군향우회연합회 고문 © 함양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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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월(引月)은 지리적으로 함양읍과 인접해 있는 곳이다. 함양읍에서의 거리로 본다면 안의(安義)와 비슷한 거리에 있다. 그런데도 훨씬 먼 곳으로 인식되는 것은 경상도와 전라도라는 지역 의식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인월은 우리 함양과 아주 밀접한 곳이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 경덕왕(景德王) 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속함군(速含郡-신라 때 함양군의 이름)을 천령군(天嶺郡)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때 인월이 속한 운봉현(雲峯縣)은 이안현(利安縣-안의)과 함께 함양의 속현(屬縣)이었다. 통일신라 말에 최치원 선생이 천령태수로 와서 상림을 조성할 당시 인월은 천령군이었다. 고려 건국 후 국가체제가 정비될 때 인월을 포함한 운봉은 남원부로 넘어갔다.
사람들의 생활과 직결되는 수계(水系)와 장마당[시장]을 보더라도 인월은 함양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인월을 관류(貫流)하는 물길은 마천을 거쳐 유림으로 흐르는 엄천 상류인데 모두가 알다시피 엄천은 위천, 남계천과 더불어 함양인의 생명수 역할을 하는 3 대천(大川)의 하나이다. 또한 인월장은 함양장과 마찬가지로 지리산에서 나는 산물을 사고팔면서 함양, 마천, 인월, 운봉 사람들이 어울리는 화합의 장이요 소통의 마당으로 기능해 왔다. 함양 장날은 2일과 7일, 인월 장날은 3일과 8일로 오늘은 함양장, 내일은 인월장으로 장마당이 이어지면서 오랜 세월 함께 살아왔다.
며칠 전 인천에 사는 친구가 내려와서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비를 함께 답사하고 인월에서 저녁을 먹고 온 적이 있다. 그날 필자는 시장 입구에 조성된 인월 역참공원(驛站公園)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공원 조형물과 편의시설을 둘러보았다. 인월은 고려 초부터 역(驛)이 있던 곳이었다고 하여 남원시가 조성한 공원이었다. 현대화된 전통시장 입구에 인월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쉴 수 있는 역참공원을 만들었으니 나는 그곳에서 놀라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인월 역참공원은 고려 때 국선생전(麴先生傳), 동명왕편(東明王篇),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등으로 우리 문학사에 큰 이름을 남긴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선생의 인월역[印月驛-인월역(引月驛)의 옛 이름) 시비(詩碑)로 인월역의 천년 역사(千年歷史)를 증거(證據)하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철제기마상(鐵製騎馬像), 마패와 역마를 형상화한 석조역마상(石造驛馬像), 지리산을 품어 안을 듯이 당당한 역원(驛院)의 석문(石門) 등을 세워 시골 소도읍 공원답지 않은 품격을 갖추고 있었기에 놀랐다.
역참은 중앙과 지방 사이의 명령이나 공문서를 전달하고 관인(官人)의 이동을 돕기 위하여 국가가 조직 관리한 교통·정보소통 시스템이었다. 흔히 초원의 작은 부족 몽골이 대원제국으로 발전하는데 근간이 된 제도로 설명되고 있으나 공문서 소통과 관인(官人)의 이동을 위한 국가 차원의 교통·정보소통 시스템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나라에서나 존재했다. 중앙의 명령 하달과 지방의 상부 보고는 국가 운영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다만 몽골에서는 그 시스템이 고도화되었을 뿐이다.
조선 시대의 역참제도는 시기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각 역도(驛道)의 중심역과 속역(屬驛)을 하나의 도(道)로 묶고 중심역에 찰방(察訪)이라는 직책을 두어 도에 속한 역무(驛務)와 역인(驛人)을 관장케 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지금의 남북한 전체가 41개 역도, 524개 역으로 편제되었는데 사근도(沙斤道)는 함양의 사근역(沙斤驛), 제한역(蹄閑驛), 안의의 임수역(臨水驛), 산청의 정곡역(正谷驛), 단성의 신안역(新安驛), 벽계역(碧溪驛), 소남역(小南驛), 진주의 안간역(安澗驛), 정수역(正守驛), 합천의 유린역(有隣驛, 삼가), 의령의 신흥역(新興驛), 하동의 평사역(平沙驛), 율원역(栗院驛), 마전역(馬田驛), 횡포역(橫浦驛) 15개 역으로 구성되었다. 부연(敷衍)하면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은 함양, 산청, 진주, 합천, 의령, 하동 등의 역로(驛路)를 관장한 행정관이요 사근역은 서부경남 정보소통·교통행정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에는 3년마다 찰방이 관할 역도의 전체 역리(驛吏), 역졸(驛卒), 역비(驛婢), 역마(驛馬) 등의 형지안(形止案)을 작성해 병조(兵曹)에 보고했다. 형지(形止) 혹은 형지안(形止案)은 어떤 사안의 전후 사정을 기록한 전말(顚末)이나 상황보고서(狀況報告書)라는 의미로 공·사 간에 널리 쓰이던 용어인데 찰방이 작성한 형지안은 호조(戶曹)에서 작성하는 일반 호적대장(戶籍大帳)과 별개로 역에 속한 인원(人員)과 마필(馬匹)을 주기적으로 조사하여 작성했기 때문에 역참제도와 당시의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수백 년 동안 전국 마흔한 곳의 찰방역에서 3년마다 각 역도의 형지안을 작성했으니 많이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찰방이 작성한 역도별 형지안은 현재 발굴된 것이 겨우 네 건에 불과하다. 그것도 세 건은 일본에 있고 국내에는 오직 하나뿐이다. 이 국내 유일 현존 형지안이 바로 우리 함양군 수동면에 있었던 사근도 찰방이 1747년에 작성한 사근도 형지안(沙斤道 形止案)이다.
사근도 형지안은 경상북도 문경시 옛길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2019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32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에서는 문화재 지정 사유를 “현재까지 조선 시대 역의 형지안이 국내에서 발견된 예는 없으며 몇 가지가 일본에서 발견되어 학계에 소개된 바 있다. 사근도 형지안은 기존 소개된 형지안에 비해 결락(缺落)된 부분이 없는 완전한 상태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므로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고 적었다. 이 형지안에는 사근도에 속한 5천 명 가까운 역인(驛人)과 마필 실태가 상세히 적혀 있다.
문경에서는 사근도 형지안을 발굴·소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자료를 연구 분석하여 발표하는 학회도 열고 ‘1747년 사근도 역 사람들’이라는 책자도 발간하여 소중한 역사 문화적 자산으로 가치를 키웠다. 하지만 정작 사근도 형지안의 작성지요 사근도 찰방이 있던 우리 함양에서는 사근도 형지안의 존재를 아는 사람조차 별로 없고 사근도 찰방이 있던 수동초등학교 자리에는 제대로 된 기념비조차 하나 없으니 인월의 역참공원 앞에서 함양인으로서 어찌 부끄럽지 않았겠는가.
남원시와 남원시의회는 인월의 탄생 배경과 역사적·지정학적 중요성을 인지하고 인월면민들이 자긍심을 갖게 하겠다는 취지로 4년간의 준비를 거쳐 2015년에 인월 역참공원을 조성했다. 남원시는 이때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인월 전통시장 공영주차장 부지를 활용하여 경비 절감과 공원 조성 효과의 극대화를 도모했다. 필자가 남원시청에 정보공개를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역참공원 조성사업은 인월면 소재지 종합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며 사업비는 공공시설 조성비로는 소액이라고 할 수 있는 1억 5천만 원을 투입했을 뿐이다. 불과 1억 5천만 원의 공사비로 역사(歷史)도 되살리고 주민의 자긍심(自矜心)도 키우고 환경(環境)도 정비하는 일석삼조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우리 함양군의회 의원이나 군청 공무원들도 역사의식과 문화적 안목을 가지고 우리 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자산을 발굴하고 선양하는 데 더 많이 노력해 주었으면 좋겠다. 서부 경남 지역의 정보 소통과 교통행정의 중심지였던 사근역 옛터에 위상에 걸맞은 기념물이나 기념관이 세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인월 역참공원 앞에서 우리 함양인이 더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