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천 재경 백전면 향우회 감사, 실용풍수학회 회장 © 함양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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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김씨 가문의 명당 발복(發福)
우리의 근세사에서 인촌 김성수로 대표되는 울산김씨 가문처럼 부(富), 귀(貴), 손(孫)의 발복(發福)과 영화(榮華)를 누린 가문이 또 있을까?
풍수지리학계에서는 인촌의 조부(祖父)가 가난한 소금장수에서 10만석의 졸부가 되고, 벼슬이 금부도사, 군수, 가선대부에 이르렀으며, 부통령과 국무총리를 배출하는 등 울산김씨 가문이 최고의 명문가 반열에 오른 이유는 선대 묘를 명당에 안장했고, 명당 터와 풍수이론으로 건축한 집에서 후손이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본다.
인촌 김성수(1891~1955) 선생은 호남 제일의 거부이자 금부도사, 가선대부를 지낸 김요협(1833~1909)의 손자로 태어났으며, 인촌이 성장하여 같은 울산김씨 일가이자 후일 초대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선생의 소개로 1932년 손병희
선생이 운영하던 보성전문학학교를 인수하여 고려대학으로 개명하고 나라의 장래를 짊어질 인재를 육성한 교육자 이자,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創刊)하고 일제 탄압에 맞서 민족혼을 일깨운 언론인이었고, 삼양사. 경성방직을 운영했던 기업가였다.
인촌은 해방 후 한민당을 조직하여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부통령을 지낸 후 1955년 서거했다. 1962년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으나 최근에 친일파라는 이유로 서훈이 취소되었다.
부통령과 국무총리를 배출한 家門
인촌은 해방 후의 극도로 혼란하던 시기에 우남 이승만과 협력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큰 힘을 보탠 후 제 2대 부통령(1951년)이 되었으나, 1952년 부산정치파동(이승만 대통령이 내각책임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한 사건)때 사임했던 한민당(민주당 전신) 당수로서 우리 근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으며, 조카 김상협은 교육부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했고, 자 김상만은 동아일보사 사장으로서 군부독재와 각을 세우며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10만석의 졸부 김요협의 전설
농업국가 시절 富의 크기를 재는 척도가 쌀 수확량인데 저 유명한 경주 최 부자나 남원 죽산 박씨가 대를 이어 만석꾼이 되었다면, 인촌의 조부 김요협은 하루아침에 10만석의 거부가 된 사람이다.
김요협은 장성에서 어렵게 살면서 부안 곰소만에서 나는 소금을 등에 지고 행상을 하면서 소금을 받기위해 정계량의 사랑채에서 대기하던 중, 정계량이 낮잠을 자면서 ‘누런 용이 사랑방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꿈’ 을 꾸다 깨었는데, 심상치 않은 길몽이라고 생각되어 사랑채에 급히 가보니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 앉아 있었는데 그 자세가 꿈속에서 본 황룡과 흡사하여 무남독녀와 혼인시켰다 한다. 졸지에 쌀 10만석의 농토와 부안 곰소만의 대형 염전을 소유하는 졸부가 된 것이다.
인촌가와 명당
울산김씨 집안은 장성, 순창, 고창 등에 명당이 많기로 소문나 있고, 호남 8대 명당에 회자되는 곳도 두 곳이나 있다.
김요협은 자신의 출세가 조상 묘의 명당발복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지사(地師)들에게 후사하며 명당을 찾아 처 연일정씨와 자신도 대 명당에 묻혔으며, 현재 우리나라 양택 명당의 표본이라는 고창군 부안면 봉안리 473 소재 인촌의 생가의 큰댁 안채, 사랑채(1861년), 작은댁 안채(1881년)를 산천의 형세와 풍수지리 이론에 맞추기 위해 남향이 아닌 서북향으로 지었다.
인촌은 1891. 10. 에, 동생 수당 김연수는 1896. 11. 에 태어났는데 1907년 봄 이 지역을 휩쓸던 화적들의 행패 때문에 현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이사하였다.
울산 김씨 문중의 특이한 점은 아무리 좋은 명당이라도 부부간 합장묘를 쓰지 않고 1묘(墓)에 1인만 안장했는데, 그 이유는 합장묘를 쓰기위해 광중을 넓게 파면 생기(生氣)가 빠져나간다는 풍수이론 때문이다.
풍수지리용어로 명당 터를 혈장(穴場), 중심부분을 혈심(穴心)이라 하는데, 혈심의 크기는 사방 2~3미터 정도이므로 울산 김씨들의 장법(藏法)도 일리가 있다.
김요협은 자신보다 먼저 사망한 본처 연일정씨를 고창군 아신면 반암리의 명당에 장사지냈고, 자신은 고창군 아신면 선운사의 백련암을 매입해서 홀로 묻혔다.
풍수지리에서는 증조부모 묘가 명당일 경우 증손이 발복 받을 확률이 가장 높다고 본다. 그 이유는 묘를 쓴 후 태어난 자가 명당기운을 받고 태어나기 때문이며, 산소에 따라 고손(高孫)이나 이성계와 이순신장군처럼 5대손이 발복하는 경우도 더러 있으며 속발복지의 경우 손자(孫子)의 발복도 있는데, 현재 상영하고 있는 '명당' 이란 영화에서 이하응이 부친 남연군 묘를 이장하고 7년 뒤에 태어난 '명복' 이 12세에 즉위하여 고종황제가 된 경우와 같다.
그렇다면 울산김씨의 명당 발복은 어느 조상의 명당 발복을 받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