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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에는 수치스럽고 부끄러움으로 얼룩진 기록 들이 많다. 수치스러운 역사란 대륙과 해양의 침략에 의한 굴종의 역사요, 부끄러운 역사는 독재 권력의 부정부패와 장기집권의 염증으로 정통성이 중단 된 정치 혼란의 사태들이다..
우리는 과거 천 년 이상을 중국 대륙의 침략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위협의 고난 속에서 지내 왔고 조선말 왜적으로부터 해양의 침략을 받아. 국권과 인권. 재산권. 모두를 잃고 내 국토 내 나라에 살면서 나라 없는 식민지 백성으로 36년을 살아오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민족에게도 준비 없는 해방의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것이 1945년 8월 15일 대한광복이다.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하여 일본을 무조건 항복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을 종전시키면서 한국은 타에 의해 해방이 되었다, 해방은 일본인들에게는 ‘청천병력’이었지만. 한국인에게는 자유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갑자기 닥친 해방의 소식에 오랜 세월 억압의 통치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우리민족은 무엇인지 어리둥절하다 이틀 날인 8월 16일에야 한민족을 상징하는 흰옷의 물결이 도시의 거리에서 시골의 골목길에 까지 전국으로 확산 되었다. 1세기도 아닌 80년 전의 일이다.
일제 침략의 잔혹한 만행들은 천 년이 지나고. 만 년이 흘러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켜 우리에게 막대한 군비와 재산 피해를 입혔고 1905년에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하여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한 후 드디어 1910년 이완용을 앞세워 우리나라 국권을 탈취하고 식민지화 했다. 우리 국민들은 권리와 재산권. 자유를 박탈당하고 우리말. 우리글의 사용금지. 창씨개명. 신사참배. 식량. 물자. 공출 등의 만행과 청.장년은 일본의 전쟁터와 광산으로 부녀자들은 정신대로 내몰려 현재까지 생사불문의 희생에도 성의 있는 태도의 사과가 없는 침략자들의 범법 행위다.
지방에서는 완장을 찬 친일세력들이 아침 일찍 이집 저집 부엌을 드나들며 솥뚜껑을 열어보고 쌀로 밥을 하면 모래를 밥솥에 뿌렸다. 일본에 공출하지 않고 밥을 해 먹는다는 이유다. 일본군 부대가 이동하는 행군에 환영하는 박수 집회에 참여하지 않으면 잔인한 구타와 일본군 부대시설의 노역으로 대가를 치르게 했다. 그 어려운 시기 대대로 살아온 같은 마을의 같은 민족에게 일제 앞잡이들의 만행 들이였다. 일본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충성을 서약한 친일의 지역간부는 일본군이 이동할 때마다 환영 군중대회를 개최하고 지역의 황제 노릇을 하다 해방 후 축적한 재물로 정치인이 되고 그들의 아들 손자가 오늘에 까지 정치의 중심역할에 있다면 용서가 될까?
또한 지방의 친일세력은 동족을 겁박하여 갈취한 재산으로 그 후손들은 오랜 세월 상토의 전답과 기와집에서 선조의 만행에 부끄러움도 없이 당시의 기득권을 누리고 살아왔고. 해방 후 처형 되었지만 그 후손들은 현재까지 주민들에게 사과 한번 없이 뻔뻔하게 그 마을에서 살고 있다.
해방 후 우리 국민들은 너무 좋아 어깨춤을 추며 이 나라의 주인은 이제 우리라며 기뻐했지만. 그러나 해방의 그 기쁨은 시작에서 끝이 나야 했고. 해방의 새로운 시작은 미소 양국의 갈라 먹기로 민족에게는 분열을, 나라에는 분단의 시작 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북한의 평양에는 8월 24일 소련군이 입성하여 주둔 하였고 9월 8일은 미군 제24군단이 인천에 상륙 서울에 진주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되었다. 9월 9일 조선총독부 건물에 일본기를 내리고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를 게양하여 분단이 예고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야수 같은 폭정에 시달려 온 독립운동가들은 개인의 안락도 포기하고 풍찬노숙의 폭압통치의 식민지 세월을 보낸 것이 수년이고 보면. “한국민에 의한. 한국민을 위한. 한국민의 나라”를 세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건국의 방법들이 서로 달랐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왜적의 항복은 하늘이 무너지는 태산 같은 걱정”이라고 탄식했다. 모든 전쟁에는 공이 있는 자들의 몫이 되는 것인데 일본의 항복에 우리는 기여한 것이 없다며 앞날이 걱정이라는 김구의 그 말은 맞아떨어졌다. 또한 김구 주석은 미소 양국의 주둔군 철수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실패했지만 남북 단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회담에 나서기도 했다.
해방 후 미군정 시절 혼란기 속에서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등 정치 거물들이 피살되고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의 뜻에 동반하여 남북 단일정부가 아닌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진행되었다.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을 대통에 선출 하고 8월 15일 취임을 하면서 세계만방에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하고 제1공화국이 시작 된것이 77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건국 후의 정국은 순탄 하지를 않았다. 1949년 6월 민족의 지도자 김구 주석이 암살을 당하고 북의 김일성은 남침을 감행하여 전쟁의 희생자가 수백만 명에 달하고 오늘에 이르기 까지 75년 동안 분단의 상태이며 노욕에 찬 이승만은 독재와 장기집권. 부정선거를 거리낌 없이 진행 하여 4선을 행한1960년의 부정선거는 국제적 수치를 남긴 역사의 사건이 되면서 4.19혁명이라는 국민궐기에 승복을 하고 건국정부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기고 말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 미국에서 민주제도를 직접 답습한 노신사 이승만은 에수의 가르침도 외면하고 독재와 장기집권. 부정선거의 원융으로 해외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제1공화국은 정통성을 잃고 종말을 맞았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망명 생활 중 1965년 7월 90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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