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학(猿鶴), 심진(尋眞), 화림(花林)의 안의삼동(安義三洞)은 금강산과 더불어 조선의 절경으로 그 명성이 매우 높다. 수많은 시인 묵객, 문인, 화가들이 안의삼동에 와서 천혜의 경관을 만고의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중에서도 특히 화림동 계곡은 거연정(居然亭), 군자정(君子亭), 동호정(東湖亭), 농월정(弄月亭)으로 이어지면서 가히 한국 정자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조선의 제일 탁족소(濯足所)는 화림동이라는 말까지 생기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화림동 계곡의 끝자락엔 역사의 비극과 장엄을 보여주는 황암사(黃巖祠)가 있어 다시금 옷깃을 여미게 한다.
황암사는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안의, 함양, 산청, 거창, 초계, 삼가, 합천 등 북부경남 7개 고을 주민 7천여 명이 7만의 왜군에 맞서 분연히 순국하신 황석산성 전투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이다. 잘 아시다시피 황석산성 전투는 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본진이 호남으로 향할 때 안의현감 곽준(郭䞭)과 전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가 주축이 되어 민관이 똘똘 뭉쳐 대적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옥쇄(玉碎)하였는데, 부녀자들은 왜적에게 치욕을 피하기 위해 피바위에서 자결하는 등 7천 백성 전원이 순국한 거룩한 역사의 현장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1708년 곽준과 조종도에게 충렬(忠烈), 충의(忠毅)의 시호를 각각 내렸으며, 1715년에는 조정의 명으로 황암사를 건립케 하여 사액(賜額) 사당이 되었다.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감 재직 시절 집필한 안의현현사사곽후기(安義縣縣司祀郭侯記)에도 황암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거니와, 당시에도 온 고을 백성들이 성이 함락된 음력 8월 18일 제향(祭享)날에는 그날의 역사를 말하며 추모의 염(念)을 되새긴다고 했다.
이렇게 황암사는 비록 왜적에 의해 순국된 비극의 역사이지만, 그에 항거한 충절의 역사기도 해 강한투쟁(强悍鬪爭)의 기질을 그대로 말해주는 안의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런 황암사를 경술국치 후 왜인들은 자신의 치욕스런 역사로 인식해 황암사를 헐어내고 200년 넘게 이어져온 제향을 금지시켰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광복 후 산업화와 경제발전 등에 밀려 잊혀져 있던 황암사의 역사가 만시지탄이나마 다행히 뜻있는 지역주민들에 의해 다시 밝혀지게 되었다. 먼저 1985년 “황석산성 순국선열 추모위원회”가 발족되어 끊어진 제향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고, 황석산성 역시 1987년 국가사적 제322호로 지정되는 쾌거가 있었다. 또한 2001년에는 황암사가 새로이 중건되어 제향이 이어지고 있는데 올해 역시 음력 8월 18일 제427주기 제향이 봉행되었다.
필자 역시 지역을 대표하는 도의원으로서 해마다 제향에 참석하였는데, 이러한 뜻깊은 제향이 민간 주도의 행사로만 진행되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 같은 시기 유사한 역사를 지닌 충남 금산의 칠백의총이나 남원의 만인의총은 일찍이 1960년대부터 국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국가제향으로 성대히 거행되고 있는 예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현재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받지 못하고 있는 황암사의 문화유산 지정은 물론 추모위원회에서 주관하고 있는 제향 역시 국가 제향으로의 신청을 서둘러야 하겠다. 이와 관련해 문화유산청에서는 올 2월 전국 20개 곳, 경남 5곳(진주 창렬사, 남해 충렬사, 밀양 표충사· 작원관지, 양산 통도사)을 호국순의 국가제향으로 선정한 바 있다.
황암사 제향 역시 이러한 국가제향으로 승격되어 호국을 위해 산화하신 영령들의 고혼을 위로함과 동시에 지역의 자랑스러운 역사 더욱 널리 알려져야 하겠다. 비근한 예인 사근산성 추모제 역시 같은 취지에서 함께 추진되어야 함이 마땅하겠다.
뜻있는 자 끝내 이룬다는 유지경성(有志竟成)의 자세로 전 군민이 합심해 황석산성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자랑스러운 제향을 후대에도 길이 전승해 나가야 하겠다. 아무쪼록 황암사에 대한 행정의 보다 면밀한 관심과 지원이 이루어지길 기대하며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