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이던 사근역 복원이 꿈틀댄다. 철도 직선화 사업으로 서울 대전 진주 함양을 경유하는 GTX 함양역 통과가 눈앞에 다가왔다. 대통령 공약 당선된 도지사군수가 한목소리로 힘을 보탠다. 충효 예절의 도시 함양의 사근역 복원은 함양관광 활성화로 주변의 유적지와 서원들의 국민적 관심을 끌며 관광수입이 늘어난다.
사근역에서 출발하는 대고대 방문길은 수동(사근역)에서 제방 둑길을 따라 오리나무 그늘이 있는 오솔길로 대고대에 도착하면 구졸암(양희)선생의 신도바가 지친 나그네를 맞이한다. 잠시 후 땀을 닦고 주막집 막걸리로 노독을 푼다. 구졸암 양희(1515~1580) 함양 삼걸의 한 분인 청백리다 사신으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 마적단의 습격으로 순직 그 자손들은 임란 때 평양성 전투에 힘을 보탰다. 함양에서 화살을 만들어 명나라 장군과 함께 싸웠다.
구국 성지 연화산 학행이 뛰어난 선현들을 모시고 서원을 개원한다. 화산서원, 남계서원, 청계서원, 구천서원··· 서원의 둘레길은 고려사직을 위한 사근산성 전투가 전해온다. 왜구들은 금강해안을 거쳐 내륙 깊숙이 상주를 거쳐 함양(사근산성)으로 모여든다. 국토를 유린한 3천여 명의 왜구를 맞아 함양 감무를 비롯한 500여 병사들이 싸웠지만 중과부적의 왜구를 막아내지 못하고 피를 흘렸다. 곧이어 달려온 이성계의 화살에 적장은 목이 달아나고 왜구들은 괴멸되었다.
연화산 자락의 화산서원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반대한 고려 충신 72현 중의 한 분이신 감무공(해남군수)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다. 자손들이 이곳(함양)에 옮겨와 학문을 닦고 벼슬을 하면서 살아왔다 회헌 임대동, 회암 임종인, 남계 임희무 세분 선생을 모신 서원을 개원했다.
서원 뒤편의 연화산 등산길은 가파르다. 50-60대 시니어들이 오르기 좋은 코스다. 40-50분 동안 운동은 심페기능 향상으로 맥박과 혈압조절의 효과가 있어 의사들이 권장하는 운동량이다. 정상에 오르면 해발 600m의 산성이 있다. 산성은 신축되었지만 깊은 우물은 메어져 흔적만 남아있다. 물구덩이에 명주 꾸러미를 넣으면 10리 밖 본통마을 냇가에서 실끝이 보인다는 전설은 수맥이 막혀 실현이 불가능하다. 서북방향으로 내려오면 남계천을 가로지르는 사근보 위로 냇가에서 천렵하는 청년들과 물놀이하는 야영객이 가득하다. 함양의 관광수입이 늘어난다. 숲속의 정자 하나가 눈길을 끈다. -망북정- 임금께 망배하며 후학을 길렀다. 남계 임희무 임금(명종)의 사랑을 받았다. 급제 후 순창부사, 울산목사를 거쳐 좌우승지를 역임했다. 병약한 임금과 임란을 걱정하며 사직했다. 망북정에서 바라보는 대고대는 시인의 시상이 떠오른다.
대고대
돌기둥이 받침되어 대(놀이터)가 되었네
푸른이끼 펼쳐놓아 손님을 마지하네
-회헌 임대동(1432~1503)
망북정에서 산길을 따라 내려오면 화산사가 신축되어 사근산성에서 산화한 500여 장병들을 위로한다. 이 고장 선현들을 모시는 서원이 개설되었다. 일두 정여창 선생의 남계서원은 선생의 학덕을 존경한 선비들 개암 강익, 남계 임희무, 일두 선생을 위한 서원이 없음이 함께 부끄러운 일이다. 서원을 건립하고 사액을 받았다. 남계(濫溪)앞냇가의 이름이다. 청계서원 탁영 김일손 사관으로 바른 역사를 기록하다 사화에 휩쓸려 극형을 받았다. 스승 김종직의 글 ‘조의제문’이 문제되었다. 피체되어 젊은 나이로 순직하셨다. 구천서원 일곱분의 선현들을 모시고 있다. 구졸암 양희선생은 함양 삼걸의 맏형격이다. 옥계 노진(이조판서) 청련 이후백 (이조판서) 구졸암 양희(2품직판서 추증) 함양 삼걸을 배출한 당곡서당의 정희보 선생과 한훤당의 학맥을 이은 삼괴당 권시민 선생은 훌륭한 교육자로 베일속에 가려진 선생들의 행적은 함양관광의 부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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