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충현 재외함양군향우회 연합회 회장 © 함양신문
|
대구의 함양 향우들은 재외함양군향우회연합회의 가을철 ‘한마음행사’와 재대구함양군향우회의 봄철 ‘고향문화탐방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 두 행사는 고향 함양을 제대로 알아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추진되고 있는데 연합회 행사보다 연륜이 오래된 대구향우회 행사를 보면 회가 거듭될수록 향우들의 참여가 활발해지고 향우들 사이의 결속력도 더욱 강화되고 있다. 대구향우회의 2017년 봄철 고향문화탐방행사는 사근산성(沙斤山城)을 답사하고 내려와 연화사(蓮花祠)에서 전몰 영령께 분향(焚香)하고 알묘(謁廟)하는 추모행사로 진행되었다.
사근은 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남북로의 교통요지인 동시에 영호남을 연결하는 동서 교통로의 중심지이다. 교통·통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국가의 공문서 전달, 정보의 소통, 관리들의 이동 편의 등을 위하여 교통요지에 역(驛)을 설치하여 운영했다. 역에는 역사(驛舍)를 짓고 역마(驛馬), 역리(驛吏), 역노(驛奴), 역비(驛婢)를 배치하여 역이 제 기능을 하도록 했는데 중심이 되는 핵심 교통요지에는 찰방(察訪)을 두어 인근 역의 역장과 역졸, 역마를 관장케 했다. 지금 수동초등학교가 있는 곳은 바로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이 있던 곳이다. 이때 도(道)는 행정청 단위가 아니라 길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근도(沙斤道)는 중심역인 사근과 연결된 도로 또는 도로망을 의미하며 사근도찰방은 사근도에 속한 역을 관할하는 우두머리 관리 찰방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가 집무하는 관청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근도찰방이 관할하는 역은 사근역(沙斤驛)과 속역(屬驛)인 함양의 제한역(蹄閑驛), 안의의 임수역(臨水驛), 산청의 정곡역(正谷驛), 단성의 신안역(新安驛), 벽계역(碧溪驛), 소남역(小南驛), 진주의 안간역(安澗驛), 정수역(正守驛), 합천의 유린역(有隣驛, 삼가), 의령의 신흥역(新興驛), 하동의 평사역(平沙驛), 율원역(栗院驛), 마전역(馬田驛), 횡보역(橫甫驛) 15개 역이었다. 속역에서 알 수 있듯이 사근역은 함양, 산청, 진주, 합천, 의령, 하동 등 서부경남 역로(驛路)를 관장하는 도로 행정의 중심지였다.
교통요지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 될 수밖에 없으니 사근 뒷산 연화산은 비록 높이가 443미터에 불과한 작은 산이지만 정상부에는 언제 축조되었는지 분명치 않은 오래된 석축 산성 기반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백제와 신라가 경역(境域)을 다툴 때부터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을 것이다. 지금 사근산성은 보수공사를 통해 옛 석축 위에 재구축된 길고 산뜻한 산성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산성 안에는 봉수대와 작은 저수지 등이 있다.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임진왜란과 일제침략기에만 일본이 우리 땅에 쳐들어와 우리를 괴롭혔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우리를 괴롭혀 왔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왜(倭)에 건너가서 볼모로 잡혀간 눌지왕의 동생을 몰래 귀국시키고 자신은 왜왕에게 죽임을 당한 박제상(朴堤上)의 이야기가 있으며 죽어서도 용(龍)이 되어 왜의 침략을 막아내겠다고 바닷속에 묻혔다는 문무대왕(文武大王) 수중왕릉(水中王陵) 이야기도 있으니 왜의 약탈과 침략은 삼국시대에도 횡행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 역사를 보면 왜구(倭寇)의 침탈(侵奪)은 일상다반사였다. 사근산성의 혈사(血史)가 있었던 14세기 후반 고려말 30년 동안만 보더라도 왜구의 침탈은 끝이 없었다. 사서에 남은 기록만 대충 추려 보아도 아래와 같다.
1350년 2월 고성, 거제 등지에 왜 입구(入寇), 4월 순천부에 왜선 침입하여 노략직, 6월 합포에 왜 입구, 9월 왜구로 인하여 진도현(珍島縣)을 내지로 옮김
1351년 8월 왜선 100여척 경기지방 노략질, 11월 남해에 왜구 침입
1357년 9월 왜구로 인하여 조운(漕運)이 끊어짐
1359년 5월 수도인 개경 인근 예성강, 옹진 지역에까지 왜구 침입
1576년 3월 진주, 7월 부여·공주 등에 왜구 침입
1377년 5월 왜구로 인해 도읍을 철원(鐵原)으로 옮기려고 풍수지리를 살핌[相地]
1380년 8월 왜선 500척이 진포(鎭浦, 지금의 충남 서천군)에 들어와 살상하고 약탈.
왜적이 선주(善州, 선산·구미), 상주(尙州)를 불태움.
상주, 선주를 불태운 왜적이 호남으로 진격하면서 사근산성 혈사가 일어났다. 위에서는 사근산성 혈사 이전 30년간의 사실만 그것도 일부만 간략하게 적었지만 1350년부터 1400년대 초까지 역사를 보면 거의 매년 몇 차례씩 왜구가 들어와 방화·살상을 저지르고 노략질을 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이때는 고려 말기로 우리의 국력이 약화 되었을 때였다. 일본은 유사 이래 지금까지 우리가 약해지고 틈이 생기면 쳐들어와 살상과 약탈을 자행했다.
1489년 4월 일두(一蠹) 선생과 탁영(濯纓) 선생은 지리산을 유람했다. 일두가 40세 탁영이 26세 때였다. 이때 탁영 선생은 속두류록(續頭流錄)이라는 유산기(遊山記)를 남겼다. 스승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두류록(頭流錄)이라는 유산기를 남겼기 때문에 그 뒤를 잇는 속편(續篇)이라는 의미로 속두류록이라 했다. 지금부터 삼십여 년 전 정재경(鄭在景)이라는 분이 ‘정여창 연구’라는 책을 출간했다. 정재경 선생은 탁영집(濯纓集) 속의 속두류록 내용을 근거로 두 사람이 지리산 유람 때 사근을 지나가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사근역에서 하룻밤을 쉰 일행은 다시 동쪽으로 말을 몰았다. 사근역에서 잠시 동안 내려오니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이 하나 있다. 지금의 함양군 수동면 죽산리에서 분덕 앞을 흐르는 개울인데 혈계(血溪) 또는 ‘피내’라고 이름하는 하천이다.
정여창은 잠시 말에게 물을 먹이면서 이 하천을 혈계라고 하는 유래를 김일손에게 일러주었다. 고려 우왕 5년 1380년에 왜구가 배 500여척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여 상주를 불사르고, 성주를 함락시킨 다음 서쪽으로 진출하여 호남의 곡창지대를 유린하기 위해 사근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삼도도원수 배극렴 등 아홉 장수가 이곳에서 싸우다 패한 데 이어 사근성을 지키던 박수경, 배언 두 장수가 군사 500여명과 더불어 혈전을 벌이다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전사하게 되니 냇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하여 혈계라 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승리한 왜적들은 함양을 짓밟아 관아를 불태우고 운봉까지 진출하여 인월역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이성계가 인월의 황산 싸움에서 왜적을 전멸시킨 것이다.
정여창이 말을 마칠 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김일손은 말에서 내려 사근산성을 한참 동안 바라본 뒤 냇물에 엎드려 여울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것이었다. 정여창은 묻지 않아도 김일손이 왜 그러는 것인지 짐작을 하고도 남았다.
정재경 선생은 이 글을 탁영집에 의거해서 썼다고 밝히고 있으나 탁영집의 속두류록에는 사실 이 부분이 간략하게 한 줄로 나와 있다. “저물녘에 사근역에 투숙하였는데 양쪽 허벅지가 아리고 아파서 다시 한 걸음도 옮겨 놓을 수가 없었다. 이튿날 천령에서 수행하여 온 사람들은 다 돌려보냈다. 말을 타고 1리쯤 가서 큰 내를 따라 남쪽으로 가는데 모두 엄천의 하류였다(曛黑投沙斤驛, 兩股疼痛 更不可步. 翌日, 盡還天嶺來隨人. 騎馬行一里許, 竝大川而南, 皆嚴川之下流).” 이 짧은 내용을 바탕으로 정재경 선생은 아마도 사근산성과 혈계의 이야기를 위에 인용한 것처럼 소설식으로 구상하여 사근산성의 아픈 역사를 후인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 같다.
사근산성은 패장지성(敗將之城)으로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혈사만 전해져 왔을 뿐 뜨거운 피를 흘리며 산화한 전몰 영령들에 대한 추모 사당(祠堂)도 의식(儀式)도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수동연화산악회 성경천 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의 발의와 추모위원회 구성, 군의회 및 지역 유지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임채호 경남도지사대행의 행재정적 지원, 연화산 아래 세거하며 살아온 나주임씨(羅州林氏) 남계공종중(灆溪公宗中)의 부지 희사(敷地喜捨) 등 제반 성력(誠力)이 모여 2015년 10월 12일 사근산성 전몰 영령 추모 사당 연화사(蓮花祠)가 완공되었다. 연화사는 국비 10억원, 도비 3억5천만원, 군비 8억원 등 총 21억5천만원의 예산이 투입되어 수동면 원평리 산53-1번지에 의총(義塚), 사당(祠堂), 제기고(祭器庫), 삼문(三門), 화장실을 갖춘 추모공간으로 당당하게 세워졌다.
여기서 참고로 논급할 것은 배극렴 장군의 참전 문제이다. 정재경 선생의 상기 진술과 신축된 연화사 비문에는 사근산성 혈전에 배극렴 장군 등이 참전한 것으로 적혀 있으나 배극렴 장군은 진주도원수(晉州都元帥),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 등으로 왜구 방어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지만 사근산성 혈전에 직접 참전하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사근산성 혈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은 모두 뜨거운 피를 뿌리며 죽었는데 배극렴 장군은 8년 후인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동조하고 1392년 7월 조준, 정도전 등과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 개국 1등 공신으로 책록되었으니 사근산성 전투에는 직접 참전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추모비문을 지은 함양 출신 허영자 시인은 “넋이여 넋이여 허공에 떠돌던 소쩍새의 피울음이여 이제야 가슴 속 원한을 씻고 깊은 안식에 들지니 오래도록 잊혀졌던 역사의 새 뜻을 새기는 이 자리의 유적은 세세 만년 민족의 유구한 삶과 생명을 증거하는 증표가 될 것”이라 적고 있다. 혈사 후 635년 만의 때늦은 역사 바로 세우기지만 연화사를 짓고 추모제를 봉행할 수 있게 만든 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며 이제부터라도 사근산성 전몰 영령들이 편안히 쉬시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아울러 우리 모두가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조상들이 어떤 희생을 했는지 알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 고향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