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충현 재외함양군향우회 연합회 회장 © 함양신문
|
서원(書院)은 선현(先賢)께 향사(享祀)를 통하여 존모(尊慕)의 예(禮)를 올리고 강학(講學)을 통하여 학문을 탐구하고 교유하던 배움의 공간이었다. 우리 고장의 남계서원은 일두 정여창 선생을 주향(主享)으로 개암 강익 선생과 동계 정온 선생을 종향(從享)으로 모시고 있으면서 음력 3월과 8월 중정(中丁)에 춘추향사(春秋享祀)를 모신다. 금년에는 8월 중정일이 추석날이라 추석날 새벽에 추향제(秋享祭)를 모셨다. 남계서원의 제관은 매번 제향 봉행 이전에 서원 이사회에서 협의를 거쳐 정하는데 금년 추향제에는 초헌관(初獻官)으로 황태진 함양군의회의장, 아헌관(亞獻官)으로 이종천 거창문화원장, 종헌관(終獻官)으로 임기종 성균관전학을 선정했다.
같은 날 도산서원에서도 추향제를 봉행했다. 이날 도산서원 추향제에서는 한국의서원통합보존관리단 이배용 이사장이 초헌관으로 잔을 올렸다. 도산서원 춘추향사의 제관은 도산서원 운영위원회에서 선정된다. 이배용 이사장은 한국의 9개 서원이 세계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분이지만 여성(女性)이다. 여성이 서원의 춘추향사에서 초헌관이 된 것은 우리나라 500년 서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도산서원의 경우 2002년까지만 해도 여성은 퇴계 선생을 모시고 있는 사당 상덕사(尙德祠)에 들어가 알묘(謁廟)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여성이 초헌관을 맡았으니 역사적 사건이라 할만하다. 우리나라 500년 서원사에 새로운 장이 열린 이번 여성 초헌관 선정은 도산서원 운영위원장이며 퇴계 선생 16대 종손인 이근필 옹(翁)의 추천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신식 교육만 받고 자란 전후 세대이며 특히 한글 전용 정책에 따라 한자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한 사람이라 옛날부터 내려온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의례(儀禮)나 동양의 고전(古典) 등에 대해 상당히 어두운 사람이다. 공직에서 퇴임한 다음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 적을 두고 재능기부 삼아 전국의 학생들에게 인성교육을 하러 다니다 보니 이제야 겨우 그런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배워 나가고 있다.
아는 게 적다 보니 불천위 제사(不遷位 祭祀)라는 것도 몰랐었다. 필자의 집안에서는 오랫동안 4대(四代) 봉제사(奉祭祀)의 예만 지켜왔기에 기제사(忌祭祀)는 고조부모님까지만 모시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모시는 어른이 정말 훌륭한 어른이면 4대가 지난 후에도 봉사손(奉祀孫)이 있는 한 위패를 없애지 않고 영원히 제사를 지내도록 나라에서 정한 제사가 있는데 그것을 불천위 제사라고 한단다. 일반 제사보다는 더 의미 있는 중한 제사인 셈이다.
퇴계 종택에서는 봉사손이 16대손임에도 아직 퇴계 선생의 기제(忌祭)를 모시고 있다. 불천위 제사이기 때문이다. 지난 1월 2일은 음력 섣달 초여드레로 퇴계 선생 불천위 제삿날이었다. 필자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전하는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지도위원으로 참제(參祭)하여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헌창(獻唱)하고 퇴계 선생의 제사상을 직접 살펴볼 수 있었다. 퇴계 선생의 제사상은 의외로 검박하고 조촐했다. 대추, 밤 등 제물을 높이 쌓고 고여야만 제사를 잘 모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허술해 보이는 상차림이었다. 그게 바로 퇴계 선생의 유지(遺旨)요 우리나라 최고의 명가 퇴계가의 전통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지금 퇴계가의 종손은 이근필 옹이다. 이근필옹은 일찍이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을 나오고 인천 제물포고등학교에서 3년간 교직 생활을 하시다가 종사(宗事)를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평생 인근 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종사와 교직을 병행하시고 교직 퇴임 후에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전하며 착한 사람이 많은 세상을 만들고자 애를 쓰고 있는 어른이다. 1932년생이니 구순을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끊임없이 독서하며 생각은 늘 유연하고 신선하다.
그런 어른이었기에 500년 서원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초헌관을 추천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 제사를 모시는 시간도 시속에 맞게 이른 저녁 시간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우리는 정성을 다하여 조상들의 제사를 모신다고 돌아가신 날이 시작되는 자시(子時)[돌아가시기 전날 밤 11시에서 1시 사이]에 모시는데 퇴계 종택의 16대 종손 어른은 퇴계 선생께서 말씀하신 시종[時從-시속(時俗)을 따름]을 거론하며 돌아가신 날 저녁 6시경에 제사를 모시는 것으로 바꾸었다. 서울서 온 후손들이 제사를 마치고 안동역에서 막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그렇게 바꾸었다고 하니 고례(古禮)에 얽매여 변화를 거부하는 양반님들께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은가.
도산서원은 지난 2002년 서원 최초로 위패가 모셔진 사당에 들어가 참배하는 알묘(謁廟)를 여성에게도 허용했고, 2009년부터는 새벽 1시에 모시던 향사 시간을 낮시간대로 바꾸었으며 3일간의 일정을 2일로 단축해서 춘추 향사를 모신다. 금년에는 마침내 500년 서원 역사상 최초로 여성을 초헌관으로 선정하는 혁신까지 이루었으니 이제는 우리도 굳이 한밤중에 제사를 모시고 멀리 있는 자손들이 다음 날 근무 때문에 허둥대며 달려가지 않도록 시속(時俗)에 맞게 제사 예법(禮法) 등을 개선해 나갔으면 좋겠다. 현대사회의 생활 여건과 부합되는 방향으로 제례를 개선하면서도 존조돈목(尊祖敦睦)이라는 본연의 의미를 살릴 수만 있다면 좋지 않을까 싶다.
도산서원 향사 여성 초헌관 시대의 개막은 현대사회의 시대적 변화를 수용한 바람직한 변화이기에 그 의미를 높이 평가하면서 우리 함양지역 향교나 서원에서도 여성 헌관의 등장을 기대해 본다. 아울러 퇴계 종가의 종손 어른처럼 우리 함양지역 명가(名家)들의 종장(宗長)들께서도 현대사회에 걸맞은 합리적 예법과 향풍 진작을 선도해 주셨으면 좋겠다.
|